Carl Orff

칼 오르프 Carl orff (1895.7.10-1982.3.29)
작곡가이자 음악교육자
오르프는 1895년 7월 10일 뮌헨에서 태어나 예술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전문 콘서트 피아니스트였으며, 오르프의 음악적 재능과 연극에 대한 열정을 일찍이 알아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다섯 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두 해 뒤에는 첼로와 오르간 연주도 시도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오르프의 창의적인 사고방식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언어와 시에 흥미가 많아 고전 언어와 문학 과목을 특히 좋아했으며, 뮌헨에 위치한 음악학교에서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1915년부터 1917년까지는 뮌헨 카머슈필레(Kammerspiele)에서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였고, 이 경험은 그의 후기에 발표된 작품들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오르프는 모든 장면을 위한 문필가, 작곡가, 무대화가, 무대장치가, 연출가, 배우-성악가, 무대일꾼, 조명에 있어서 뛰어난 소질을 보였습니다. 또한,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친구였던 쿠르트 작스(Curt Sachs)의 영향을 받아 르네상스와 초기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에 깊이 몰두하였으며, 특히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1923년, 오르프는 도로테 귄터(Dorothee Günther)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와 함께 율동, 무용, 리듬 훈련을 위한 학교 설립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화를 통해 그는 오랫동안 구상해 온 ‘기초 음악(Elementare Musik)’에 대한 생각을 더욱 구체화하였습니다. 이 음악은 단순한 추상적 표현이 아닌, 말하기(Speech), 신체 표현(Movement), 춤(Dance) 등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한 것이었습니다.
1924년, 오르프와 귄터는 뮌헨에 귄터학교(Günther-Schule)를 설립하였고, 몇 명의 강사들과 함께 체육과 무용을 포함한 주요 과목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르프는 음악 과목을, 귄터는 이론 과목들을 담당하였습니다.
1925년과 1926년에는 무용가 마야 렉스(Maja Lex)와 구닐드 케트만(Gunild Keetman)이 각각 귄터학교에 입학하였고, 오르프는 이 두 사람이 무용과 음악에 있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이후 이들은 오르프와 함께 음악과 춤의 원초적 표현을 탐구하는 협력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케트만은 음악과 무용 모두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오르프는 그녀의 기여 없이는 『오르프 슐베르크』의 존재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케트만은 또한 오르프 악기 앙상블과 그 음악적 스타일의 발전에 있어서도 지대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르프는 1920년대 후반, 악기 제작자인 칼 맨들러(Karl Maendler)의 도움으로 오늘날 ‘오르프 악기’로 알려진 선율 타악기를 만들게 됩니다.
1930년, 렉스와 케트만은 귄터학교 학생들과 함께 무용단과 오케스트라를 결성하여 독일 전역 및 해외에서 공연을 진행하였으며, 이를 통해 귄터학교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같은 해, 오르프의 음악 교육에 관한 첫 출판물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출판을 통해 자신의 ‘기초 음악’ 철학이 오해될 수 있음을 염려하였습니다. 즉흥 연주를 핵심으로 하는 이 음악은 악보로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학생들은 창의적인 즉흥 연주보다는 악보에 기록된 틀에 머무는 경향을 보였지만, 오르프는 출판이야말로 기초 음악의 교육적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고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1931년부터 귄터학교의 강의, 시범, 교육과정이 독일 음악교육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33년, 오르프를 후원하던 문화교육부 관계자가 해임되었고, 당시 정부는 오르프의 음악 교육 방법이 당시의 정치적 성향과 충돌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일부 저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출판이 금지되었으며, 오르프는 점차 귄터학교 교육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1944년, 정치적 압력과 폭격으로 인해 귄터학교는 폐교되고 건물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1935년부터 1942년 사이, 오르프는 대표적인 세 작품인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 《달(Der Mond)》, 《슬기로운 여자(Die Kluge)》를 작곡하였습니다. 이 작품들은 오르프의 독창적인 음악 언어를 잘 보여주었고, 많은 교사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바이에른 방송국(Bavarian Radio)에서 오르프의 교육용 작품 음반을 발견하고, 그에게 어린이들을 위한 방송 시리즈 제작을 요청하였습니다. 오르프는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지만, 이는 자신의 잊고 있었던 교육적 이상을 실현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구닐드 케트만과 함께 어린이 방송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1948년 첫 방송인《Children Make Music》이 전파를 탔고, 이는 어린이·학부모·교사들의 큰 호응을 얻어 방송 시리즈로 확대되었습니다.
1950년부터 1954년 사이, 오르프와 케트만은 이 방송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적 개념을 정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오르프 슐베르크(Orff- Schulwerk)』 시리즈를 총 5권으로 출판하였습니다. 부제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Music for Children)’ 이었습니다. 다만 라디오 방송만으로는 ‘기초 음악’에서 중요한 요소인 신체 표현(Movement) 을 충분히 전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1949년, 케트만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Salzburg)의 모차르테움(Mozarteum) 음악대학에 초청되어 어린이 과정을 맡게 되었고, 그때부터 ‘오르프 슐베르크’ 안에 신체 표현 교육이 본격적으로 통합되었습니다.
1961년에 오스트리아 잘쯔부르그(Salzburg)에 세워진 오르프-연구소에서 오르프는 1982년 3월 29일 생을 마칠 때까지 음악교육자 후진양성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